새파란 :: 새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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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엔 집이 있습니다.

거기 가면 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저 집에서 '제대로' 쉬기 위해

허덕이며 달려온 무수한 순간들,

그 순간들은 불행해도 되는 걸까요?

세상 모든 곳을 안식처로 삼을 수는 없었던 걸까요?

 

 

 

형태 없는 마음을 자꾸 특정하게 형태화하면

상처받는 건 결국 자신입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어느 하나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순간의 마음을 절대화하지 않고

마음의 풍경들을 지켜보면서 가던 길을 가는 수밖에요.

보초니의 '걷는 자들'처럼 말이죠.

 

 

 

에피쿠로스가 이른 결론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필요한 욕망과 그렇지 않은 욕망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꼭 필요한 것만을 추구하는 생활에 익숙해지기.

이것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삶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으로 만듭니다.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모르는 것,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례'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이기적'이 되어야 합니다.

타인의 말과 시선에서 벗어나

고독 속에서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내가 구축해온 환상을 남김없이 부수는 용기를 발휘할 때만

우리는 비로소 같은 짓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사랑하고, 헤어지면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그뿐,

상대를 원망하거나 자신을 비하하거나 '진정한 사랑'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직을 반복하는 일은 없게 됩니다.

 

 

 

인간이 보는 바다와 파리가 보는 바다가 같을까요?

아이가 보는 장미와 어른이 보는 장미가,

죽음을 앞둔 이가 보는 해돋이와 젊은이가 보는 해돋이가 같을까요?

대상은 같은데 의미만 다른 게 아니라,

실제로 만물은 만물에게 다른 방식으로 보이고 느껴집니다.

 

 

 

습관은 무섭습니다. 오로지 하나의 방향만을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어쩌지 못하는 내 마음, 거기에 관성의 힘이 강하게 작동합니다.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더욱 미워하게 되고,

사랑하지 말자 하면서도 계속 집착하게 되는 것처럼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높이더라도

흔들거리며 중심을 잡는 것,

폭풍우를 응시하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그러다 보면 방향감각도 생기겠지요.

어쩌면 육지에서보다 더 많은 길들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빛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반짝거리는 수많은 별들을 봅니다만,

사실 저 별빛은 이미 오래 전에 출발해서

지금에야 우리에게 도착한 '과거의 빛'들입니다.

어쩌면 저 중에 어떤 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지도 모를 일이죠.

서로 다른 시간에, 다른 곳에서 출발한 빛이

'현재'라는 이 시공간에 함께 빛나고 있다니,

생각만 해도 경이롭지 않으세요?

 

 

 

우리는 자신을 볼 수도,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자신의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그야말로 자신에 대해 완벽한 '남'인 셈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거울'이 있습니다. 바로 타자들입니다.

나를 스쳐간, 나와 마주쳤던 무수한 타자들.

그들이야말로 또 다른 내 모습들입니다.

 

 

 

외부의 척도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순간 자신을 사라져버립니다.

사회적 쓸모가 자신의 존재를 규정해버리면 '쓸모' 이외의

나머지 부분은 간과하거나 부정하게 되는데,

이 '나머지 부분'이야말로 '쓸모'로 환원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이거든요.

선택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나는 나로 살아야 하고 삶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도 연연하기보다는

축복하면서 그 순간을 떠나 보내야 합니다.

매 순간의 삶ㅇ르, 매 순간의 젊음을, 그리고 나 자신을.

아쉬워 마세요.

그러고 나면 우리에게는 또 다른 순간이,

오직 한 번밖에 경험할수 없는 젊은 늙음이 올 테니까요.

 

 

 

자책과 자만, 열등감과 우월감의 뿌리는 결국 같습니다.

타인과의 비교, 그겁니다.

현재의 자신을 '더 나은 자신'과 비교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 '더 나은 자신' 자체가 타자의 시선을 기준으로 만든

허구적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잘나서 교만한 것도 아니고,

못나서 자학하는 것도 아니죠. 자학이 교만이고, 교만이 자학입니다.

 

 

 

뭉크는 사랑과 배신과 죽음과 질투로

얼룩진 삶 속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닥친 사건들을 감당했습니다.

도망치지도 원망하지고 않고, 죽을 때까지 그림 속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후회 없이, 그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건에 걸맞게

뭉크 자신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루쉰은 말합니다.

인생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그저 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 길을 가면 된다고요.

원래 길이란 없었다고, 걸어가니 길이 되었다고요.

누구나 결국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돼 있습니다.

정말 할 수 없다면, 그때 가서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으면 됩니다.

다만 어떤 길을 가든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클래는 하나의 색이 갖는 가치를

언제나 다른 색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했습니다.

대개 노랑은 따뜻한 색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변에 어떤 색이 놓이느냐에 따라서 차가운 색으로 돌변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파랑은 따뜻한 색이 될 수도 있고요.

색들은 그렇게 다른 색들에게 빚집으로써만 비로소 자신의 색을 발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강철을 뜨거운 불과 차가운 물을 오가며 수없이 달궈지고, 두드려 맞고,

담금질되는 과정을 거쳐야만 예리한 검으로, 창으로, 낫으로 단련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뜨거운 불과 차가운 물을 오가죠.

그사이게 겪는 마음의 번뇌란 상상도 할 수 없고요.

그러나 그 외에 다른 삶이란 없습니다.

때문에 상처 없는 삶을 꿈꾸는 건 삶에 대한 무례입니다. 

 

 

 

잉태의 순간을 '바로 이때'라고 정지시킬수 없듯이,

죽음의 순간 역시 '바로 이때'라고 정지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로지 한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넘어가는

'사이'로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흘려보내는 이 '순간들'이야말로

실은 유일한 '영원'이 아닐까요?

 

 

 

기혼자든 미혼자든 예외 없이,

자신이 맺는 관계나 일에서 어느 순간 권태가 엄습해옵니다.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 '중간'에 끼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삶,

'남들처럼' 살려고 기를 쓰는 삶 속으로, 권태가 스며들죠.

삶의 권태는 '반복'에서 생깁니다. 관계의 반복, 일의 반복, 사고의 반복.

문제는 그 권태로부터 어떤 출구도 찾지 않으려는 게으름입니다.

 

 

 

클래스 올덴버그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햄버거가 아니라 이 시대의 욕망입니다.

이 시대의 거대하고도 초라한 욕망. 채우면 채울수록 결핍감도 커진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욕망은 허기진 괴물처럼 거대합니다.

동시에 기껏해야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게

고작이라는 점에서 이 시대의 욕망을 초라합니다.

 

 

 

끊임없이 오해를 하겠지만, 계속해서 의도치 않은 성처를 주고받겠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생각을 다른 입장에서 볼 수 있으니까요.

또 자신을 떠나 타인의 마음에 가닿을 수 있으니까요.

 

 

 

봄이 내년을 위해 오늘 힘을 아껴둘까요?

꽃이 무성하면 무성한 대로, 시원찮으면 시원찮은 대로,

봄은 지금 이 순간 최선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자연은 후회를 모릅니다. 존재가 곧 능력이니까요.

요컨대 당신이 지금 할 수 있는 것, 하고 있는 것, 그게 바로 당신의 전부입니다.

이 말은, 지금 바로 당신 자신을 실험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실패하겟지요. 분명 넘어질 겁니다.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그게 바로 삶이니까요. 

 

 

 

화면에 있는 점 하나, 선 하나, 색채 하나까지도 없어야 할 것은 없습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모두가 완전하게 자신의 음색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칸딘스키의 유토피아,

정확히 말하면 비균질적인 공간, 헤테로토피아입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뒤섞이고 어울리는 이 '중심 없는 세계'의 한복판에서만,

우리는 아파하고 상처 입으면서도 다시 사랑하고

길을 만들어 나아가며 새로운 자유를 발명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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